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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파트릭 모디아노

생각하는 사람 2호 2025. 3. 30. 03:02

파트릭 모디아노는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작가입니다. 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을 잃은 사설탐정 '기 롤랑(Guy Roland)'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모디아노의 세계를 특유의 짧고 절제된 문장으로 그려낸 이 소설에 대한 두서없는 서평입니다.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책표지

 

1. 유령들의 박물관

 
한때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비치된 물건들이 들고 났던 상점. 초콜릿 가게, 사탕 가게, 담배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을 거리.
지나간 시간들은 그 가게들이 진열해놓았던 어느 작은 상자 속에 오래된 사진들처럼 보관되거나, 바래거나, 잊혔다.
 
그리고 이제 불이 꺼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소설의 주인공 ‘기 롤랑’이 더듬더듬 헤매기 시작한다.
 
기 롤랑은 사교계 사람들의 정보를 찾아주는 일을 하는 사설탐정의 조수로 8년 전부터 일해오고 있다. 그들에게 최고의 박물관은 사교계 인명부와 전화번호부이다. 하나의 세계가 그 속에 빼곡히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 롤랑은 자신의 과거를 찾아갈 때마다 이 전화번호부에서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못한 당시의 흔적들, 그 흔적들을 찾을 끈을 발견해 나간다.
 
하지만 그 전화번호부 속의 번호와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 죽거나, 사라지거나, 흔적만 남기거나. 혹은 사라진 전화번호 뒤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찾아 헤맨다. 마치 유령의 목소리들처럼.
 

2. 사라져버린 과거라는 초현실

 
기 롤랑은 한때 페드로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페드로 메케부와였다. 혹은 지미 페드로 스테른이라는 가명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리스 출신이지만 모두들 남미 사람이라 기억하는 남자.
그의 동료 ‘위트’가 젊은 시절 빛나는 테니스 선수였다는 것을 믿기 힘든 것처럼, 젊은 시절의 페드로가 지금의 기 롤랑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만큼 구체적인 것은 없지만, 1초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초현실이 된다. 분명 내가 살았던 시간이고 그 시간을 산 것은 나 자신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현실이 아니고, 그 현실 속의 나는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은 말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파동. 그 파동들이 뭉친 것이 바로 ‘나’라고.
 
이제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은 나의 기억.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한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 기억조차 시간과 함께 왜곡되고, 바래고, 사라진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그리고 타인의 기억 속에서도.
그래서 기억을 잃은 기 롤랑은 아무것도 아닌, 단지 하나의 실루엣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묘사한다.
 
하지만 또 그의 말대로, 수많은 거리, 건물들의 창문 어디엔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지나가던 상점 진열대에서 본 책 제목에서, 공터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이름에서, 과거의 어느 한 시절 그를 알았던 누군가가 그를 떠올린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한 그 사람은 죽지 않은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면 그것이 진정한 죽음이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페드로’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기 롤랑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어도 그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실종된 프레디는 그래서 죽은 게 아니라 산호초 속에 숨어버린 것이다.
 

3. 삶은 반짝여서 슬프다

 
하지만 모든 것은 순간의 반짝임이다. 결국은 모두 사라진다. 해변이 단 몇 초만 발자국을 간직하듯. 누구도 해변가의 남자가 사라진 것을 기억하지 못하듯.
기억이든, 시간이든, 삶이든 그것이 찬란하고 슬픈 것은 반짝이기 때문이다. 반짝, 순간적인 빛을 발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게이 오를로가 살던 집 창문으로는, 말을 탄 기수들이 뿌연 먼지만을 남긴 채 창문 끝에서 끝까지 순식간에 달려 사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이 삶에, 타인의 기억에 남겨놓는 흔적들은 그렇게 짧고, 쉽게 사라지는 것들이다.
 
삶은 한순간 반짝이고 서서히 어두워져 간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전거를 지나쳐 뛰어가는 아이가 함께 놀던 친구들을 잊어버리듯. 소설 속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스러져가는 것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한때 프레디와 친구들이 모이곤 했던, 지금은 퇴색된 여름방, 안개,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는 등, 바람, 석양, 어둠. 그리고 모든 것을 갉아먹는 종달새, 자살한 모델, 쇠락한 피아니스트, 퇴물이 된 사진작가 등 온갖 군상들까지.
 
게다가 과거를 추적해 나가는 기 롤랑의 계절은 10월이다. 추위가 아직은 유예된 따뜻한 가을. 하지만 곧 겨울이 오면 끝을 향한 소멸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모디아노의 초기작 ‘청춘시절’에 그런 문장이 나온다. 청춘을 지나 안정된 지역에 다다른 삶은 페달을 밟지 않고 저절로 미끄러지며 그렇게 떠나는 것이라고.
 
페드로가 과거를 잃어버린 채 온전히 그것을 되찾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이 청춘이기에. 반짝하고는 이미 사라져 다시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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