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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시> 집요한 리뷰 – 당신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가?

생각하는 사람 2호 2025. 2. 25.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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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  그의 다섯 번째 영화인 <시>는 이창동 추천 영화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작가였던 이창동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빌어 쓴 시는 어떤 모습일까요? 영화의 주제와 장면 분석을 통해 긴 리뷰를 써봅니다.
 
 

1. 이창동 영화의 특징 - 현실을 직시하는 영화적 시선

 
불이 꺼진 극장 안 흰 스크린의 여백 위에 빛으로 만든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는 지나치게 생생한 현실의 빛을 잊고 영화가 인도하는 환상으로 떠날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이창동의 영화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쉽게 현실에서 눈 돌리고 안도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그 암전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늘 우리의 현실을 꼭 닮은 세계이고, 그 속엔 현실의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필연적으로 가해자의 얼굴을 하거나 피해자의 옷을 입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 태초의 순결성을 상실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하고, 결국엔 우리 자체를 상실해가는 몸의 비극성을 지닌 존재들.
 
그래서 애초부터 구원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창동의 영화는 세상에 던져진 누구나가 겪어야 하는 본질적인 고통에 카메라를 들이대므로. 데뷔작 '초록물고기'부터 밀양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피해자이건 가해자이건 상관없이 삶의 고통을 제 몸으로 관통해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초록물고기에서부터 오아시스에 이르기까지 이창동의 영화가 고통받는 인물들에 대한 변주였다면, 밀양에 이르러 그의 영화가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변합니다. 밀양 에서 이창동은 고통 그 자체에 대해 말하고 묻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이해받는 것은 가능하냐고. 유괴당한 아들이 사체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신애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내리쬐는 햇살 아래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구원받지 못했던 그녀의 고통은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 되어 그의 다섯번째 영화 속에 다시 내려앉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다시 묻습니다. 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냐고.
 
 

2.  영화 <시>가 던지는 질문 - '본다'는 것의 의미

 
그 답을 찾기 위해, 이창동은 질문에서 한걸음 물러서는 방법을 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는 예순을 지나 인생의 노년에 들어선 여인 양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전작의 인물들과 비교해 이 여인의 위치는 애매모호합니다. 그녀의 외손자가 한 소녀를 자살로 몰아넣은 공범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아들을 잃은 '밀양'의 엄마, 신애의 대척점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미자가 사건과 맺는 방식은 신애의 경우보다 훨씬 간접적입니다. 이는 그녀가 본질적으로는 이 사건의 외부인이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피해자의 고통 혹은 가해자의 죄책감에서조차 한 다리 건너, 한 발 떨어진 입장에 선 미자는 따라서 이창동의 이전 인물들과 다른 선상에 놓여있는 인물입니다.

미자가 사건을 겪어내는 방식도 이전의 인물들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사건을 겪어내는 방식은 보는 행위를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는 미자가 시를 쓰는 과정과 겹쳐지면서,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이창동 영화 &lt;시&gt; 리뷰_양미자 캐릭터 해석
이창동 영화 <시>의 한 장면

 
그렇다면, 이 '본다'는  사건은 영화 속에서 어떤 식으로 펼쳐지고 있을까요. 미자가 등장하는 첫번째 시퀀스의 첫 장면은 아들을 잃은 한 팔레스타인 여인의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합니다. 병원 대기실에 마련된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나오는 그녀의 절규는 무심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사람들과 그 속의 미자에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않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문을 나서던 미자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소녀의 어머니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넋을 놓은 듯 딸을 찾아 헤매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의 슬픔이 화면을 넘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질 때, 그것은 조금 더 현실적인 울림을 갖습니다.
미자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것은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다 학부모들 모임에서 자신의 고등학생 손자가 그 소녀 희진을 자살로 몰아간 여섯 명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자가 사건과 맺는 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하고, 본다는 행위 또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순식간에 사건의 방관자 에서 사건의 당사자 라는 영역의 테두리로 끌려옵니다.
 
이제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손자의 장래를 위해서 눈을 감을 것을 강요합니다. 미자는 말없이 방을 나가 꽃을 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죠. 그리고 이 순간은 그녀가 시를 위한 첫번째 문장을 긁적이는 시점이 됩니다. 이 장면은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질문에, 진짜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던 시인의 대답에 조응합니다.

미자는 이제 단순히 시선을 던진다는 의미의 보는 것에서 벗어나,진짜 보는 단계로 나가고 그것이 그녀의 첫번째 시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자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소녀의 영결미사가 열리는 성당에서 사진 속 소녀의 얼굴을 보고, 강간사건이 일어났던 학교 과학실로 찾아가 현장을 보고, 소녀의 어머니를 봅니다.
 
그리고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그녀는 간접적인 가해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고, 가해자로 서는 순간,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시선은 이렇게 죄의식과 마주합니다.
소녀의 영결미사가 열린 성당에서 소녀의 친구들이 자신을 쳐다볼 때, 소녀의 엄마가 유리문 너머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미자는 그 시선에서 도망치듯 휘청휘청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미자의 시선이 무심한 손자의 등에 집요하게 물은 것 또한 죄의식입니다. 왜 그랬냐는 미자의 애끓는 물음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던 손자의 끈질긴 거부는, 그 시선과 마주쳤을 때 느껴야 하는 죄의식에의 거부이겠죠.
그가 거부한 죄의식은 미자에게로 돌아와 또다시 그녀의 몫이 됩니다.

 
 

3. 영화 <시>의 주인공 - 씻겨주는 여인

 
볼수록, 제대로 바라볼수록 그녀는 사건의 내부로, 고통의 중심으로 다가갑니다. 간접적인 가해자로서 사건의 테두리에 서있던 그녀는, 합의금으로 사건을 무마하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하는 학부모들의 공간에서 나와 그 공간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창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그 얇고 투명한 벽을 넘어, 그녀는 소녀의 피처럼 붉은 맨드라미가 피어있는 세상으로 나오고, 침묵이 내려앉은 과학실 복도를 지나 소녀가 강간당했다던 과학실 복도를 찾아갑니다.

 
이 순간, 미자의 보는 행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입니다. 뺨과 코가 짓눌릴 정도로 창문에 얼굴을 밀어붙이고 어두운 과학실 안을 들여다보는 동안, 창문 위로는 그녀의 불규칙한 호흡이 창백한 그림자를 토해냅니다. 이것이 초록물고기의 막동이가 자동차 창문에 구겨진 얼굴을 박고 뱉어내던 절박하고 슬픈 호흡의 레미니상스(reminiscence)라는 점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죽어가던 막동이의 마지막 호흡이 미자의 얼굴에 겹쳐지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호흡이란 내 몸과 바깥세계 사이의 교환이며, 그 호흡을 통해 외부세계와 타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영혼이 유기적 재료로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호흡이며, 막동이의 호흡은 그래서 그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뱉어낸 삶의 징표였습니다.

에서 재현된 이 호흡은, 따라서 사건의 현장을 목격하는 미자의 떨림인 동시에, 그녀의 몸을 통해 돌아온 망자의 혼입니다.
 
본다는 것은, 이렇듯 시선의 문제를 넘어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육신으로 확장됩니다.런데 이 확장 혹은 전환은 그녀의 몸에 찾아온 질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자가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존재의 상실이라는 아픔에 날카롭게 공명합니다.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올 때는, 스스로가 죽음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자신이 간병하는 반신마비 노인이 생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남자구실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을 때 화를 냈던 미자가, 치매 진단을 받은 후 다시 그를 찾아가 관계를 맺는 것은, 그렇게 시들어가는 자신들의 육신에 대한 연민과 위로의 몸짓일 겁니다.
 
이 시점에서 미자가 몸을 씻어주는 여인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간병인으로서 그녀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그 노인의 몸을 씻어주는 일입니다. '씻김굿'이라는 명칭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상징하는 신체 모형을 씻어주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몸을 씻어주는 여인이 가지는 상징성은 꽤 큽니다.

타인의 때를 씻어주고, 죄를 씻어주고, 한을 씻어주는 여인, 미자. 그녀는 망자의 영혼을 불러들여 그의 혼을 위로해주는 무당처럼 그렇게 제 몸 안으로 타인의 상처와 죄의식, 고통을 받아들여 모두를 위한 위로의 의식을 치룹니다.
 
소녀를 제 안으로 불러들이는 의식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층적으로 고조되어 갑니다. 또 다른 가해자 소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그를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는 미자를 볼까요. 그녀의 머리 위, 벽에 걸린 르느와르의 그림 속 소녀는, 미자와 같은 자세로 다소곳이 앉아있습니다.

마치 확장된 신체의 일부처럼 미자의 머리위에서 그녀와 함께 사뿐사뿐 걷던 모자는, 소녀가 뛰어내린 다리 위에서 강물을 굽어보던 순간, 미자에게서 떨어져 나가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강으로 떨어집니다. 한송이 꽃잎처럼 가볍고 가련하게.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미자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시의 제목은 소녀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입니다. 시인의 목소리가 이 제목을 읊고 나면, 영상은 잠시 소리 없이 미자의 부재를 비춰줍니다.

이제 목소리만 남은 미자가 아네스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화면위에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소녀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그와 동시에 미자의 목소리는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고 미자의 존재는 완전히 상실됩니다. 아니, 이 말은 틀렸습니다. 미자는 아네스가 되었으니까요. 미자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소녀 아네스는 나지막이 시를 읊조리며 마지막 이별의 말을 전합니다.

완벽한 同化의 성취.

그래서 이 시는 소녀에 대한 위로의 굿인 동시에 미자 자신에게 바치는 제사입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가는 생명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강의실 탁자위에 시와 함께 놓여있던 흰 꽃다발은, 스스로의 영전에 바쳐진 꽃다발이었던 셈입니다.
 
 

4. 강과 다리 - 삶과 죽음이 만나는 장소

 
아네스의 노래 라는 시가 읽히는 동안, 영상은 우리의 눈앞에 존재하던 자의 부재와, 부재하던 자의 등장을 차례로 펼쳐놓습니다. 미자가 손자와 함께 살아가던 아파트, 배드민턴을 치던 집 앞 공터,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소녀의 엄마를 찾아가던 길 그 어디에도 더 이상 미자의 모습은 없습니다.

반면 전화기 너머 목소리로만 존재하던 미자의 딸은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이 들리고 나면 텅 빈 아파트 안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사진 속에서만 보이던 아네스는 목소리로 부활해 마지막 순간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이 서로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체 혹은 환치는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미자에게 최초의 기억은, 빨간 커튼이 만들어낸 그림자 사이에 얼굴이 반쯤 잠긴 채 햇살 속에 서서 어서 오라며 손짓 하는 언니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추측컨대) 지금은 세상에 없는 미자 언니의 이러한 이미지는 삶과 죽음의 영역에 걸쳐 서서 산 자를 부르는 망자의 손짓처럼 느껴집니다. 삶의 최초의 기억은 노년의 스러짐,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와 이렇게 조우합니다.

미자가 소녀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길 위에는 작은 살구들이 그림자 사이의 햇빛에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미자의 표현을 빌자면 그 살구들은 다음 생을 위해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 존재들입니다. 땅에 떨어진 살구는 영원한 죽음을 맞는 대신 땅 속에 씨를 뿌려 다음 생을 기약하기 때문입니다.
 
살구의 이미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소녀의 이미지와 맞물립니다. 여기서 소녀가 몸을 던진 장소가 강물위에 놓인 다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창동의 전작 박하사탕을 기억해볼까요. 주인공 정호는 강물을 가로질러 그 위에 놓인 철교로 뛰어올라갑니다. 돌진해오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나 돌아갈래 라고 외치던 그의 절규는 강물과 다리, 그리고 회귀성이라는 단어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보게 해줍니다.

다리는 떨어진 두 곳을 연결해주는 장소이며, 강은 연어가 삶의 근원을 찾아 회귀하는 곳입니다. 더욱이 이창동은 미자가 시낭송회에 참석하기 위해 연어가 돌아올 때 라는 이름의 카페를 들어서게 함으로써, 강물이 품은 회귀성에 대한 힌트를 우리에게 슬쩍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강은 결국, 또 다른 생명을 낳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 바꾸어 말하자면 죽음이 생명을 낳고 생명이 죽음으로 돌아가는 장소입니다.
 
삶과 죽음의 반복성과 회귀성은 아네스의 시 끝자락에도 선명하게 표현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그럼 이제 검은 강물에 뛰어들 소녀의 죽음은 어디로 이어질까요.

소녀는 강물을 내려다보던 등을 세우고 천천히 몸을 돌려 정면을 응시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강물에 떠내려 온 소녀의 등을 보았던 우리는, 영화의 끝 장면에 다다라서야 이렇게 소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화면은 소녀가 뛰어들었을 강물의 어둠속으로 침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그 검은 스크린 위로 스크롤과 함께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흐릅니다. 주의를 기울이면, 이어지는 새소리와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암전된 화면 위로 흐르는 이 소리가 바로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이어지고 어둠과 빛이 조우하는 것이죠. 검은 강물을 건넌 소녀는 이제 눈을 떠 당신을 만나기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요. 고개를 돌린 그 소녀의 시선 끝에 존재했던 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관객, 즉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우리의 시선만이 영원한 소멸로부터 소녀를 구원할 수 있는 힘입니다. 강이라는 장소의 상징성은 이런 식으로 완성됩니다.
 
 

5. 결말 해석 - 미자가 남긴 '아네스의 노래'의 의미

 
사실, 기록과 관련된 모든 작업은 망각과 상실의 강에서 기억을 건져 영원으로 승화시키려는 미이라 컴플렉스를 품고 있을 겁니다. 미자가 쓴 도, 이창동이 쓴 도 이 점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영화 속 미자가 시를 써서 소녀를 구원했다면, 이창동은 라는 이름의 영화 속에 소녀와 미자를 함께 묻음으로써 그들에게 영원을 부여합니다.

그 출발점은 시선이었고 그래서 문제는 결국 본다는 행위로 다시 귀결됩니다. 그리고 시선의 문제는 영화 속 인물에서 확장돼 그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 혹은 감독, 그리고 영화 전체를 바라보는 관객으로까지 확대됩니다.
 
관객의 시선과 영화 속 세계의 관계는 카메라 렌즈가 누구의 눈으로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가에 따라 변주됩니다. 소녀를 제 몸으로 품기 전까지의 미자가 사건의 테두리에 서서 소녀와 관련된 사건을 들여다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카메라도 영화가 진행되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미자의 앞이나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지켜봅니다.

카메라는 미자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그녀의 등을 함께 보여주고, 미자가 사라진 다음에야 그녀가 본 것들에 시선을 돌립다. 버스에서 내린 미자가 정류장에 붙어있던 시 강좌 포스터를 쳐다본 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서야 등장하는 포스터 인서트 컷은,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을 택한 카메라의 시선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중립적이고 냉정한 카메라의 시선은 미자에게로의 섣부른 감정이입을 가로막습니다. 이같은 관찰자의 시선은 이창동의 영화세계에 들어간 관객이 언제나 요구받는 것이었지만, 라는 영화의 중심사건이 보는 행위라는 명제를 납득한다면, 그 의미는 보다 깊어 보입니다.

사건 혹은 소녀가 원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다면, 그 원의 테두리에 서서 중심을 바라보는 미자가 있고, 그런 미자를 둘러싼 또 하나의 테두리 위에 선 카메라가 있는 것입니다.
카메라가 미자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그녀를 관찰하는 한, 관객도 그 카메라와 함께 그녀 주위의 테두리를 돕니다.
 
가끔씩 카메라가 그녀의 세계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갈 때조차 이 관찰자의 위치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다른 가해자 학생들의 아버지들과 처음 대면하는 시퀀스를 볼까요.

벽 하나를 차지한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바깥 풍경이 보이고, 그 창문 앞에 여섯 명의 학부형들이 앉아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충격을 받은 미자는 천천히 일어나 방을 나가고, 카메라는 그녀를 따라 나가는 대신 움직임 없이 방안을 풀샷으로 비춥니다.
한동안 프레임에서 사라졌던 그녀는 곧 창문너머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방안에 앉은 다섯 명의 남자들은 일제히 그녀를 쳐다봅니다.

이 장면에서 풀샷으로 비춰진 학부모들의 공간은 관객을 향해 열립니다. 덕분에 관객은 그들과 같은 자리에 앉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관객이 영화 속 세계에 잠깐 들어온 이 순간, 그 세계는 다시 분리됩니다. 아버지들이 미자를 두고 하는 얘기는, 관객에게는 들리지만 미자에게는 들리지 않음으로써, 창문 안의 공간과 창문 밖의 공간은 스크린 위 영화의 세계와 관객의 현실처럼 물리적으로 분리된 두 세계가 되는 것입키다.

이러한 미장센은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또 하나의 스크린으로, 미자를 그 스크린 속의 인물로 만듦으로써, 관객에게 여전히 미자의 관찰자 역할을 행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런데 미자의 관찰자 역할을 하던 카메라는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미자가 사라지면서, 관찰의 대상을 상실합니다. 미자가 사라진 자리에 선 소녀는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합니다. 전통적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은 영화라는 허구적 세계를 보존하기 위해서 금기시됩니다. 소녀가 정면을 응시할 때 그것이 관객을 영화 속으로 초대하는 시선이라는 것은 그래서 더욱 명백합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끌려 갑작스럽게 영화 속으로 들어간 관객은 소녀의 시선과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이 순간은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시선이 비로소 맞부딪히는 순간인 동시에 그들이 서로 자리바꿈을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소녀이고, 그녀의 시선에 노출된 것은 우리이니까요.

미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 엄마의 시선을 피했듯이 우리도, 당신도 소녀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가요. 소녀의 고통을 무심히 바라보던 영화 속 가해자들처럼 당신도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았던가요. 당신의 그 상처 없음은 당신 역시 그들의 무리 속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시선에 대한 집요한 질문은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를 향한 질문임이 드러납니다. 당신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가. 아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영화는 소녀의 시선을 빌려 그렇게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6. 시인의 마음으로, 영화에 묻다

이창동 영화 '시' 리뷰
이창동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

 
미자가 아네스를 기억하며 시를 쓴 것처럼, 이창동은 미자를 카메라에 담으며 시를 만들었습니다. 감독은 영화의 제목 가 한편의 시가 아닌 문학 장르를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메타영화로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속에서는 시와 영화가 형식적으로 일치하는 순간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미자의 시상이 적힌 종이가 인서트 컷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장면들입니다.
이 장면들 속에서 흰 종이의 프레임은 스크린의 프레임과 겹쳐지면서 스크린 그 자체가 되고, 그 위에 씌어진 문장들은 무성영화의 자막들처럼 관객에게 읽혀집니다.
앙드레 바쟁(Bazin)은 그림을 다룬 영화가 회화와 스크린 사이의 미학적 공생물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말을 빌자면, 이 영화는 시와 영화 사이의 미학적 공생물인 셈입니다.

는 이렇게 문학과 영화라는 두 장르를 공생시킴으로써, 시와 영화에 대해 얘기합니다. 시를 배우면서 미자에게 떠오른 질문들과 시를 쓰고자 하는 그녀의 절박함은, 따라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도 그대로 적용될지 모릅니다.
 
영화 속에서 시인은, 시를 쓰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미자가 시 강좌 수강생 가운데 유일하게 시를 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시를 쓰려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자는 꽃을 좋아하고,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사춘기 소녀처럼 웃고 재잘거리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피해자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꽃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갈 만큼, 그리고 시상에 도취해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잊어버릴 만큼, 미자는 철없는 할머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 숨은, 늙지 않는 소녀의 보드라운 속살이야말로, 그녀가 시를 쓸 수 있는 원천이었습니다.

노래방에서 미자의 뒤에 걸려있던 소녀의 그림이 르느와르였던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죠. 그는 말년까지 황금빛과 분홍빛을 놓지 않았던 화가였고, 고단한 삶의 길을 관통하면서도 행복을 그렸던  화가입니다. 말년의 화가가 놓지 않았던 분홍빛처럼, 미자 역시 삶의 순결성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미자의 소녀적 감성과 자기도취를 비웃던 사람들, 즉 우리들은 자신의 죄의식을 외면하지 못한 그녀가 손자를 경찰에 넘기고 죽어간 소녀를 제 몸에 품어 위로의 굿을 치루는 순간,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순결한 죄의식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영화와 감독, 그리고 그 존재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영화는 예술적 도취인가. 사회와 인간의 고통을, 영화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름다움과 추한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던 시 쓰는 여인 미자처럼, 예술의 아름다움과 고통스런 현실 사이에서의 균열 앞에 감독은 고민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영화를 찍는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과 물음이 될 것입니다.

속에 나타난 이창동의 리얼리즘은 결국, 시를 쓰려는 마음 의 영화적 발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시선과 고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결코 관음증으로 끝나지 않도록, 원초적인 순결성과 보드라운 속살을 간직한 채 세상을 바라보려는 마음 말이죠.

그리고 그 마음이 관객에게로 확장될 때 우리는 그것을 적어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구원은 아닐지라도요. 라는 리얼리즘 영화 속에 이창동은 이렇게 작은 판타지 하나를 심어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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